Classic car buffs come into the Chun Mee restaurant in Delano, approach the 84-year-old man standing behind the counter and ask if the rumors are true. Is he the one who designed the iconic Mustang-based Shelby Cobra in the late 1960s?
John Chun says no, points to a photograph of a man next to a 1967 Shelby, and says: "That young guy in the picture, he's the one who did it."
번역: 미네소타한미여성회 (http://kawamn.org/yahoo_site_admin/assets/docs/KAWA_September_2012.25491908.pdf)
한국 이민인이 미네소타주로 오기전에, 1960 년대에 명성을 얻은 스포츠용 자동차 형체를 설계, 미국
자동차 역사를 새롭게 인식 시켰습니다.
쟌 전씨께서 그리신 쉘비 머스탱오리지날 스케치
위의 사진은, 쟌 전 씨께서, 댄
머틸라씨께서 소유하고 있는 1968 쉘비-머스탱 지티 500 KR 옆에 서서 사진을 찍은 것임. 미스터 전은 1967, 1968, 1969 쉘비 머스탱 디자인을 하신분 중의 한분임.
델라노 시에 있는 전미 식당에 클래식 자동차 열광자들이 들어와, 그들이
들은 소문이 참말이냐고 식당 카운터뒤에 서 계시는 84 세의 노인에게 묻기를; 할아버지가 쉘비 코브라를 토대로 1960 년대 후반, 그 상징적인 머스탱 디자인을 하신분입니까?
그러면 할아버지는, 아니오, 라고
대답을 하시며, 손가락으로 1967 쉘비 옆에 서서 사진을
찍은 젊은 청년의 모습을 가리키며, “사진에 있는 저 청년이 디자인을 했다오.”
할아버지는, 방문객들이 더 자세히 보겠다고 사진쪽으로 몸을 기울이는것이
더 재미 있다는듯 보고만 있습니다. 그들이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
젊은 청년이 바로 그들앞에 서 계시는 할아버지의 젊은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어떨때에는, 그들이 믿어지지 않아 “할아버지를 그냥 만져 보고만 싶어 한다오,” 라고 부인, 헬렌 전 씨께서 말씀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웃으시며, “그들의 생각에는, 내가 실제 인물이라는것을 믿지 못한다오.” “그들이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내가 동양 사람인데 미국의 유명한 자동차를 디자인 했다고 하니,
거기에다 또 내가 동양인뿐만 아니라 나는 북한 사람이라 하니 그들은 더 믿을수가 없다오.” 그들이
또, 미스터 전 께서 브랟리 지티를 디자인 했고, 현대 자동차를
처음으로 만들어 내는데에 대해 상담조언을 했으며, 탕카 토이사 에서 일을 하게 된 계기로 이 분이 미네소타주에
정착하게 된것을 알게 되면 또 놀라게 되지요. 이 회사에서 장난감 차종류를 선을 보이기 위해 실제 자동차
디자이너를 구해 이 작업을 총 감독하게 하려고 한 것이지요.
이분은 지금, 부인께서 경영하는 식당에서, 부인께서 요리사/손님 시중/식탁
청소/설겆이 등을 하시는 동안에 손님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이분의 주요 임무입니다. 부인께서 할아버지를 놀리시기를 “돈 받는 직업을 좀 구하시오,” 하시는 그 부인께서 할아버지를 참 자랑스러워 하는것을 역력히 나타냅니다. “사람들이
이분을 만나보겠다고, 그리고 사진이라도 한번 같이 찍어 보겠다고, 오클라호마, 뉴욕, 플로리다 에서도 왔었다오,”
라고 부인께서 하셨습니다. 경주차 운전자가 기업인으로 변신 그분의 이름을 자동차에 붙여
명성을 얻은 미스터 캐롤 쉘비씨의 오월달 사망으로 인해 이 조그만 일자 쇼핑상가 식당에 방문객들이 더 찾아오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작년에 위암을 발견한 미스터 전씨는, 몇분 남지 않은 초창기
운영인들중의 한분에 속합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현실을 느끼게 된다오. 그 사람들이 다음에 여기를 오면 그 만나고 싶었던 그를 만날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1986 년부터 1968 년도
쉘비 지티 500 를 소유하고 있는 댄 머틸라씨는 그차를 디자인 하신분이 이 미네소타주에 사신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하지만 어디에 사시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쟌 께서 저 한테 전화를 걸어 그분이, 시가 행진하는
내 차에 같이 탈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Blaine 시에 있는
Dan's Complete Automotive 주인이신 미스터 머틸라씨는, 그 기회를 단번에
잡았습니다. 다른 쉘비 소유자들과는 달리, 이분은 아직도
그 힘좋은 차를 시내에 운전하고 다닙니다. 이것은 차를 디자인 하신 분 한테는 더 좋을수 없는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미스터 전씨는 쉘비 소유자들이 그들의 차를 차고에만 뒀다가 단지 자동차 쇼에만 한번씩
끌고 나오는것을 반갑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차는 운전을 하도록 디자인을 한 것이다오,” 라고 하시고는, “토우를 하는것이 아니라오.”
이렇게 올줄은 몰랐다오
헬렌 쩐 씨께서 식당 손님들 시중드느라 식당안을 분주하게 다니시는 동안, 쟌
전씨께서 그분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엔지니어의 쌓여진 이야기를 하나하나 섬세하게 풀어
놓으셨습니다. (그 분께서 처음으로 보신 미국인 그리고 그 미국인이 피우던 담배 이름까지 포함을 해서
회상을 해 주셨습니다.) 거기다 더 얹으면, 이 분은, 어느분 이든지 만나자 마자 곧 친구가 될수 있는 분인데, 그분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데에는 시간이 좀 걸려야 됩니다. 이야기를 좀 하시다가, 사진을 좀 보시다가, 이야기 좀 더 하시다가, 닭날개를 좀 잡수시다가 또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실것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이 남북으로 갈라졌을때에, 엔지니어이신 아버님께서 남한에 있는 삼촌댁에 가서 공부를 하라고 밀어 주셨습니다. 그후 그분은 집에 딱 한번밖에 못 갔습니다. 미스터 전씨의 작은
고향의 마을이 “정 반대 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집에
방문을 한것이 잘못 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오” 라고 하시며,
“어쩌면 나는 [북한]을 다시 빠져 나오지 못할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내 고향에서 탈출을 해야만 했다오, 그렇게
해서 나는 다시 서울로 숨어 들어 왔다오.” 이분은 캘리포니아에 와 있던 친구의 권유로 멀지않아 친구가
있는 곳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고, 그이민 생활은 그렇게 순조로운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제일 먼저 했어야 했던일이 영어를 배워야 해서, 영어 강습
등록을 했다오,” 라고 하시고는, “내가 낙방을 했기에 통과를
받기 위해서는 다시 강습을 받아야 했다오.” 로스엔젤레스 국제 공항에 있던 비행기 창고를 고쳐서 만든
쉘비회사 사무실 책상에 처음 앉으신 이분은 그렇게 큰 포부가 없었습니다. 이분은 본인이 곧 디자인할
차가, 어느날 그차와 함께 명성을 얻을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분은 그저 해고를 당하지 않기만 바랬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내가 뭐를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오.” 라고
하셨습니다. “회사의 총 감독 엔지니어가 [대학생 직원 채용전] 에 나와서 나를 뽑았는데, 나는 그분이 왜 나를 택했는지 전혀 몰랐다오. 이분은 나한테 무슨일을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를 해 주지도 않고 그냥 가서 일만 하라고 했을 뿐이라오.”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머스탱 종의 고성능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경주차를 전문으로 만드는 쉘비 회사에 하청을 주었습니다. 미스터 전씨의 주어진 임무는 머스탱 차의 바닥 뼈대를 놓고 그것을 둘러싸는 차 자체의 형체를 구상 설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은 실제로 이 책임을 맡을수 있는 이상적인 관념의 배경이 이미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공과 학위를 받으신 이후 미국에 오셔서 설계도안과 학위를 받기 이전에, 7 년 동안 자동차 정비 기사로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자동차 공정 과정을 안밖으로 알뿐만 아니라—“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려를
감안 일일히 모든 설계를 다 했다오”—그 뿐만 아니라, 이분은 또 필요에 따라 연장을 들고 차를 직접
만들수도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격 때문에 이 차를
팔수있는 시중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머스탱 차 한대당 $2,000 불이었는데, 쉘비 차는 한대당 $4,000 불이었다오.”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때에 한대 사두지 않았던것이 지금은 좀 부끄럽다오. 내가 그만한 여유도 없었다오. 그리고 또 그것이 어떤날에 $250,000 달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믿지못할 일이었다오.”
미스터 쉘비씨는 이분의 디자인을 보기 위해 시시때때로 들렀는데, “들를적
마다 그분은, ‘뭐 하나 보기 좋은것 있어?’” 미스터 전씨는
그렇게 되돌이켰습니다. “그분은 제가 그려놓은 것들을 보시고는 몇장을 손에 쥐어 가져 가시며, ‘걱정 하지마, 내가 도로 갖다 줄것이니.’ 하셨지만 그분은 한장도 도로 갖다 주지를 않아, 난 또 다시 그것을
그려야 했다오.” 그렇게 말씀 하시는 이 분의 목소리에는 짜증기도 하나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분은, 미스터 쉘비 밑에서 일을 했던 그당시가 그만큼 재미있었다고
침이 마르드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누구의 관념이든지 쉽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분은 나한테 딱 한번 거절을 했다오.” 라고 미스터 전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경주용 차쪽의 운영을 몰래 기웃기웃 하다가 그분한테 들켜서, 내가
그분 한테 말 하기를, 나는 둘다 [경주용 과
도로용차] 를 할수있는데 했더니,
‘네 사무실로 도로 들어가.’ 라고 그분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얼마 되지않아, 미스터 전께서
1969 년도 모형에 마지막 손질을 보고 있을때, 회사에서 그 회사의 비행기 창고의 임대권을
잃었습니다. 포드사의 결정은, 도로용 차생산을 인계 받아, 그차를 쉘비 머스탱이라고 새로 이름을 지었 습니다. 포드사에서 미스터
전씨께 일을 주셨지만, 이분은 미시건주, 디얼본시에 있는
크라이슬러 본사에서 일 하시는것을 선택 했지요. 3 년이후, 이분은
탕카 토이사에서 온 전화를 받았는데, 실은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오전 10 시에, 매일같이 나한테
석달동안 전화를 했다오.” 라고 하십니다. “결국은 그들의
끈질김이 이겼다오.”
모든 형체 설계의 천재
“그들이 나한테 말하기를, 장난감 설계사는 충분히 있다.” 고 하며, “그들이 말하기를, 내가
미네소타에 오면, 그들이 나를 잘 보살펴 주리라, 그러고는
그들이 그렇게 했다오. 그들이 나를 Lafayette 클럽에
넣어 줬는데, 매일 밤, 저녁 먹으로 갈때 마다 꼭 쓰리피스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나는 그것이 아주 으뜸이라고 생각을 했다오.” 이분은 1977 년에 헬렌씨와 결혼을 해 지금 사시고 있는 마운드 시에 정착을 했습니다. 탕카 토이사를 떠난 이후, 이분은
여러가지 설계도안을 하셨는데(이분이 진공 청소기 특허품을 냈음) 또 Bradley GT 를 창안 했는데 이것은 취미로 본인의 차를
직접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정해진 재료를 이용 쉽게 차를 만들수 있도록 한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미네소타 회사였다오, 우리는 모든일을 이곳에서 했다오.”) 그리고
또 자동차 디자인의 상담 서비스도 했습니다. 그중의 한 고객은 이분의 고향 나라, 한국에 있는 현대 회사 였습니다.
“신사 세분—그중의 한분은 그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마운드에 있는 우리집을 찾아와서는 말하기를, 그분들이 자동차 사업에
손을 대 보고 싶다고 했다오.” 라고 하시며, “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원형을 만드는데 $4 내지 $5 밀리언 달러가 든다고 했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건 너무 많이
부른다며 그들이 떠났다오. 그러다가 그들은 이탈리안 회사를 택했다오.
이 이탈리안 회사에서 그들의 차를 만들어 줬다오. 그차는 아주 아름다운 차 였다오. 하지만 [교통부] 법규에
적합하지 않아 운전을 할수없는 차 였다오.” “그들이 나 한테 전화를 걸어, 내가 그것을 고칠수 있겠느냐고 물어 왔다오. 내가 말 하기를, 그러게 말이지, 처음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들었어야 할것이 아니오, 난 그것을 고칠수 있다오.”
미스터 전씨는 마음속 깊이 우러나오는 인간적인 도리에, 일년전 까지만
해도, 옛날 그분의 명성높은 차를 침체에만 두었었는데, 이분이
부인과 함께 지하실을 청소하다가 이분이 쉘비사에 일을 했었던 그당시의 이분께서 그린 원 도형들을 좀 발견해, 헬렌
전씨께서 이것을 액자에 넣어 식당에 전시해야 겠다고 생각, 전시 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사람들이, 왜 자동차 도형 그림이 우리 식당벽에 걸려 있느냐고
물었고 그렇게 해서 말이 퍼지게 되었다오,” 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나를 믿지 않았다오. 하지만 한번 믿은 사람은, 그들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한다는 말이, ‘네가 당장 이리 와
봐야 해!’”
미국 쉘비사, 홍보부 이사이신, 미스터
롸져 소렐씨께서는, 이분의 공로를 세상사람들에게 오래전에 인식을 시켰어야 했었습니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쟌은 그냥 탁월한분이 아니라—아주 기상천외한 분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그차의 문화인이며 또 일부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라고 하시며, “만약 이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여기에 서 있을수가 앖었을 것입니다.”